연초에 자크데리다의 <글쓰기와 차이>를 읽기 시작했다.
허나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메아리속을 겉돌기만 할뿐, 도무지 읽히지가 않았다.
글을 '잘'쓰고 싶어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청년시절엔 정말 간절히 원했었다. 하지만 이제 난 그 소망을 버렸다. 그 까닭은 내게 '잘'쓰는 재능이 없다는걸 확실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듣는것을 더 잘하듯이 쓰는것보단 읽는것을 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것도 최근의 일인듯 싶다. 사실 난 제대로 읽기훈련을 받은적이 없다. 무엇을 읽든 자의적으로 읽었을뿐 그 텍스트들이 지닌 고유의 성질들을 잘 알지 못했다. 난 이제 텍스트들을 잘 읽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아트앤스터디에서 하는 롤랑바르트의 강좌를 신청했다. 이 강좌를 신청한 이유는 텍스트를 정확히 읽고 싶다는 이유에서 이다. 그리고 내 트라우마이자 컴플렉스인 '사랑'에 대한 공부이니 망설임 없이 수강을 했다.
어제 첫강의를 듣고 좀 당혹스러웠다. 물론 긍정적인 면이 강하긴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강의였다. 이 책은 철학서도 수필도 소설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소설적인 글'이라고 했다. '소설적인'이라는 이 모호한 의미는 무었인지...
롤랑바르트는 구조주의 기호학자이다. 하지만 그는 늘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그가 메타언어에서 표현언어로 넘어가고자 했던 일련의 준비작업의 산물이라고 했다. 그는 왜 '소설적인 글'이란 모호한 용어를 사용했는가.
현대소설의 내면화가 진행되면서 표현언어들은 자서전적 글쓰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즉 자신의 내밀성을 언어로 재연한다는 의미이다. 허나 현대언어는 물질성을 배제하고 있다. 문제는 '내밀성'이란 것이 물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하나의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다. 즉 소설의 형식으로는 이 '내밀성'을 재연하는데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구조주의자인 그의 인식인 것이다.
문자의 원형은 물질성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들은 글을 읽을때 글자 자체를 읽는것은 아니며. 그 글자의 뜻을 이해하려고 하는것이다. 만약 이것이 전부라면, 몇날 몇일밤을 지새우다. 결국 어떠한 표현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편지지에
"사랑해......이 말밖에 할 수가 없어."
란 연애편지와, 같은 문구의 휴대폰 문자가 주는 감정의 전달은 같아야 할것이다. 비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니피에 혹은 빠롤 만 존재한다면 말이다.
고대 문자들은 현대처럼 잉크를 펜을 사용하여 종이에 쉽게 적을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문자의 원류는 비문이라고 했다. 즉 각인시키는 것이다. 이 물질성을 지닌 문자가 지금의 정신성을 지니게 된 계기중에는 "사도바울"이 있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3절에 이렇게 말했다.
즉 '먹'이라는 물질이 아닌 '영'이라는 정신으로 쓰는 것이며, 비석이 아닌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란 바울의 선언은 언어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고 한다.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우리는 사랑에 빠진 순간 그 내밀함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단편적인 랑그를 내밷을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말더듬이가 되고, 파편화된 말들을 하게 된다고 한다.
롤랑바르트는 이 책에서 괴테,슈베르트,슈만,셰익스피어등의 텍스트에 나오는 사랑의 언어들을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 내고 있다. 이 책에는 전통적인 구조가 들어 있지는 않다. 구조주의자인 탓에 ‘소설적인 것을’ 빌어 오긴했지만 말이다.
그는 Figur와 Argument, Fragment를 사용하여 독자들을 대화의 공간으로 이끌고 있다. 즉 그가 말한 Figur는 문자의 물질성이며 탈코드화된 단어이며 재스츄어이며 멜로디속에 한 톤을 의미한다. 위에서 적은 것처럼. 몇일밤을 지세우다가 고작 밷어낸 문장인 “사랑해……이 말밖에 할 수가 없어.”란 문장이 Figur이다. Argument는 이 Figur에 대한 간락한 설명이며, Fragment는 Figur에 대한 설명이다. 각 Figur는 어떤 연관도 없는 독립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글쓰기를 ‘소설적 글’이라고 말한 것이다. 바르트는 그의 독자들이 이 Figur와 마주한후 그의 Fragment를 읽고 그 뜻을 생각하는 그런 독서를 원하지 않았다. 즉 바르트의 Fragment는 하나의 예시일뿐 그 예시를 통해 독자 각자가 자신의 Fragment를 생성해 내길 원했다. 결국 바르트에게 읽기는 읽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어떤 행위(쓰기던,그리기던,듣기던)를 불러와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독서’라고 말한다.
강의가 끝난후 귀가 하면서 사실 마음이 좀 무거워 졌다. 좀 편하게 책을 읽기 위해, 또 언어학공부를 위해 워밍업으로 수강한 강의인데, 너무 무거운 주제인듯 했다.
Re-mothering이란 용어가 있다. mothering이란 어머니가 영유아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보살피는 일을 의미하며, 이 과정을 통해 애착관계가 형성되고, 이것이 사람의 정서와 감정의 바탕이 된다는 것인데, 엄마가 된 여성은 자신의 아이를 돌보면서 자신이 영유아시절 부족했던 감정들을 위로되고 해소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냥 re-mothering이란 용어가 생각났다. 사랑의 단어를 언어를 공부하면서 어제의 사랑이든, 오늘의 사랑이든, 그리고 원치는 않치만 내일의 사랑이든지 이런 모든 내 사랑이 위로받게 되길 바랄지도 모른다.
강의가 있을 때마다, 그 강의의 느낌들을 적을 예정이다. 나만의 Fragment들을…
허나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메아리속을 겉돌기만 할뿐, 도무지 읽히지가 않았다.
글을 '잘'쓰고 싶어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청년시절엔 정말 간절히 원했었다. 하지만 이제 난 그 소망을 버렸다. 그 까닭은 내게 '잘'쓰는 재능이 없다는걸 확실히 인식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보다 듣는것을 더 잘하듯이 쓰는것보단 읽는것을 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것도 최근의 일인듯 싶다. 사실 난 제대로 읽기훈련을 받은적이 없다. 무엇을 읽든 자의적으로 읽었을뿐 그 텍스트들이 지닌 고유의 성질들을 잘 알지 못했다. 난 이제 텍스트들을 잘 읽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아트앤스터디에서 하는 롤랑바르트의 강좌를 신청했다. 이 강좌를 신청한 이유는 텍스트를 정확히 읽고 싶다는 이유에서 이다. 그리고 내 트라우마이자 컴플렉스인 '사랑'에 대한 공부이니 망설임 없이 수강을 했다.
어제 첫강의를 듣고 좀 당혹스러웠다. 물론 긍정적인 면이 강하긴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강의였다. 이 책은 철학서도 수필도 소설도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글을 '소설적인 글'이라고 했다. '소설적인'이라는 이 모호한 의미는 무었인지...
롤랑바르트는 구조주의 기호학자이다. 하지만 그는 늘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그가 메타언어에서 표현언어로 넘어가고자 했던 일련의 준비작업의 산물이라고 했다. 그는 왜 '소설적인 글'이란 모호한 용어를 사용했는가.
현대소설의 내면화가 진행되면서 표현언어들은 자서전적 글쓰기의 형식을 띠고 있다. 즉 자신의 내밀성을 언어로 재연한다는 의미이다. 허나 현대언어는 물질성을 배제하고 있다. 문제는 '내밀성'이란 것이 물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하나의 딜레마가 생기는 것이다. 즉 소설의 형식으로는 이 '내밀성'을 재연하는데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구조주의자인 그의 인식인 것이다.
문자의 원형은 물질성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들은 글을 읽을때 글자 자체를 읽는것은 아니며. 그 글자의 뜻을 이해하려고 하는것이다. 만약 이것이 전부라면, 몇날 몇일밤을 지새우다. 결국 어떠한 표현법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편지지에
"사랑해......이 말밖에 할 수가 없어."
란 연애편지와, 같은 문구의 휴대폰 문자가 주는 감정의 전달은 같아야 할것이다. 비약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시니피에 혹은 빠롤 만 존재한다면 말이다.
고대 문자들은 현대처럼 잉크를 펜을 사용하여 종이에 쉽게 적을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문자의 원류는 비문이라고 했다. 즉 각인시키는 것이다. 이 물질성을 지닌 문자가 지금의 정신성을 지니게 된 계기중에는 "사도바울"이 있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3절에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즉 '먹'이라는 물질이 아닌 '영'이라는 정신으로 쓰는 것이며, 비석이 아닌 가슴에 새기는 것이다.란 바울의 선언은 언어학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고 한다.
현대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우리는 사랑에 빠진 순간 그 내밀함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단편적인 랑그를 내밷을 뿐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말더듬이가 되고, 파편화된 말들을 하게 된다고 한다.
롤랑바르트는 이 책에서 괴테,슈베르트,슈만,셰익스피어등의 텍스트에 나오는 사랑의 언어들을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풀어 내고 있다. 이 책에는 전통적인 구조가 들어 있지는 않다. 구조주의자인 탓에 ‘소설적인 것을’ 빌어 오긴했지만 말이다.
그는 Figur와 Argument, Fragment를 사용하여 독자들을 대화의 공간으로 이끌고 있다. 즉 그가 말한 Figur는 문자의 물질성이며 탈코드화된 단어이며 재스츄어이며 멜로디속에 한 톤을 의미한다. 위에서 적은 것처럼. 몇일밤을 지세우다가 고작 밷어낸 문장인 “사랑해……이 말밖에 할 수가 없어.”란 문장이 Figur이다. Argument는 이 Figur에 대한 간락한 설명이며, Fragment는 Figur에 대한 설명이다. 각 Figur는 어떤 연관도 없는 독립적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런 글쓰기를 ‘소설적 글’이라고 말한 것이다. 바르트는 그의 독자들이 이 Figur와 마주한후 그의 Fragment를 읽고 그 뜻을 생각하는 그런 독서를 원하지 않았다. 즉 바르트의 Fragment는 하나의 예시일뿐 그 예시를 통해 독자 각자가 자신의 Fragment를 생성해 내길 원했다. 결국 바르트에게 읽기는 읽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닌 어떤 행위(쓰기던,그리기던,듣기던)를 불러와야 한다는 것이며 이것이 ‘독서’라고 말한다.
강의가 끝난후 귀가 하면서 사실 마음이 좀 무거워 졌다. 좀 편하게 책을 읽기 위해, 또 언어학공부를 위해 워밍업으로 수강한 강의인데, 너무 무거운 주제인듯 했다.
Re-mothering이란 용어가 있다. mothering이란 어머니가 영유아를 정신적 육체적으로 보살피는 일을 의미하며, 이 과정을 통해 애착관계가 형성되고, 이것이 사람의 정서와 감정의 바탕이 된다는 것인데, 엄마가 된 여성은 자신의 아이를 돌보면서 자신이 영유아시절 부족했던 감정들을 위로되고 해소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냥 re-mothering이란 용어가 생각났다. 사랑의 단어를 언어를 공부하면서 어제의 사랑이든, 오늘의 사랑이든, 그리고 원치는 않치만 내일의 사랑이든지 이런 모든 내 사랑이 위로받게 되길 바랄지도 모른다.
강의가 있을 때마다, 그 강의의 느낌들을 적을 예정이다. 나만의 Fragment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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