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 행위를 조롱하거나 한탄하거나 경멸하기보다는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베네딕트 스피노자,정치논고,16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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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 어쩌다 손가락이 닿을때
아펙트2011. 5. 30. 23:19
바르트 강의를 리부하면서 밤을 지세웠습니다. 물론 새벽 3:45분에 시작한 참피온스리스 결승전을 보긴했죠.
밤새 리뷰한 내용은 "접촉"에 대한 것입니다. 바로 육체적 접촉을 말하는 겁니다. 짝사랑하는 사람과 우연치 않게 여행을 가게 된겁니다. 그녀는 피곤했는지, 내 어께에 가만히 기대옵니다. 뭐...가볍게 몸을 움직일 수 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때 난 어떤생각이 들었을까요?
혹은 처음보는 사람이 그럴수도 있구요. 가끔 버스나 전철에서 그런 일이 있거든요.
그 순간 난 그 접촉된 육체에 집중하게 됩니다.
손을 잡으면 그 손에, 무릅이 닿으면 그 무릅에, 그 어깨에.
그때 나는 그녀를 육체로 대상화 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사람, 내가 만질 수 있는, 그리고 sex로 이어질 수 있는, 그때 그 사람은 내게 육체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접촉이 있은 후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고, 그리고 애무를 하고 sex를 할 수 있게되겠죠. 그런데 sex후 어떤 기분이 들까요? 아주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이건 아닌데...'란 묘한 감정에 사로잡힐 수 있을겁니다. 뭔가 부족한듯 하기도 하고, 실망스럽기도하겠죠. 왜죠?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또 매혹스러운 그녀와의 결합인데 말입니다.
그는 그녀를 좀 알아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마치 장난감을 사랑하는 아이가 장난감을 전부 분해해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그녀의 모든 것을 들여다 보고 싶어 하는 것이죠. 잠들어 있는 그녀를 봅니다. 머리카락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또 눈을 들여다보고, 귀를 ,코를 ,눈을 들여다 봅니다. 그렇게 분리해서 들여다 보면서 그는 이런 저런 말을 하게 되죠.
"오른쪽 눈꼬리가 좀더 올라갔네",
"손보단 발이 더 하얗네"
이렇게 저렇게 규정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그녀의 육체를 알아갈 수록 매혹이 사라져 버리는걸 느끼죠. 철학적으로 말하면 '물화'시킨다고 합니다. 나로부터 분리해 대상화 시키는 것이죠.
그렇다면, 나를 그토록 매혹시킨, 그것은 무엇이었단 말인가요? 바르트는 이렇게 대상화 된 육체를 "가까운 육체"라고 규정합니다. 포르노를 볼때 우리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그 사람의 육체 그 자체입니다. 그 사람을 육체로 규정한 후에, 육체를 분리하고 특히 성적부분에 집중하게 되듯이, 대상화된 육체는 "가까운 육체"라는 겁니다.
이렇게 대상화 되고 분리된 육체는 인간의 문명사에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볼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체에 대해 이중감정을 가집니다. 그중 하나는 '더러움'입니다. 예를 들자면, 땀,소변같은 배설물들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육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은 가장 육체적인것인데 말입니다. 또 다른 시선은 '매혹적'이란 시선입니다. 육체에서 더러움을 없애고, 매혹적인 부분만을 '육체'로 규정하려 한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발레'란 형식에서 잘 나타나죠. 여성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킨 발레리나의 육체, 사실은 대단히 폭력적인 것인데 말입니다. 결국 인간은 육체를 조련하고 있습니다. 마치 동물을 사육하듯 말입니다. "육체의 문명사"는 따로 공부를 해 봐야 합니다만. 사실 우리가 중요시 하는 정신은 육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즉 정신은 육체로 부터 온것이죠. 그런데 어느순간부터 육체는 정신에게 관리되게 되는 역전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정신과 육체는 어느것이 우위에 설수도 없으며, 분리 될 수도 없습니다. 분리되고 대상화 된 육체는 결국 상처화 된 육체입니다.
이 분리된 육체, 대상화된 육체를 바라보는 나 그리고 대상, 모두 상처받은 육체입니다. 이 상처받은 육체가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서로 위안을 받고, 위로받고 치유"될까요? 도덕화를 시킨다면 그렇게들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대부분은 더 큰 상처를 서로에게 만들 수 있죠. 결국 히스테리만 남게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대상화 된 육체가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바르트는 이것을 "먼 육체"라고 말합니다. 근접할 수 없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육체, 이를테면, 같이 있다가 골돌히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순간, 그 순간의 그 사람 처럼, 나로서는 탐색할 수도, 알수도 없는 분리되지 않는 그 사람의 전체로서의 육체, 극단적 타자성의 정점에 있을때의 육체. 만약 이런 육체와 결합할 수 있다면, 그 sex는 특별한 기쁨이 있습니다.
바르트는 sex를 '선물주기'로 규정합니다.
무엇을? 나를,
어떻게, 그 사람에게 꼭알맞는 것으로 나를 바꿔서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아름다웠습니다.그렇습니다. 매혹된 것이죠. 내가 그 사람으로 자꾸 바뀌어 갑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그 무엇이 되어 갑니다.
어떻게 주어야 할까요?
'주기'는 나를 소비하는 겁니다. 소비는 투자하는 것이고, 보상을 원하는 것이고, 또 교환하는 것입니다. 즉 나를 주는걸 보여준다는 것이죠.
"나는 하루종일 그녀를 생각하는데, 그녀는 날 얼마나 생각할까?"
"나는 그녀에게 내 모든 것을 줬는데..."
어느순간 내 사랑을 보상받지 못한다는 걸 알고, 나는 분노 합니다.
주기(to give)속에 sex는 가까운 육체와의 관계를 의미 합니다.
주기가 아닌 헌정하기(to dedication)은 무엇일까요?
내가 더 많이 주려는 것이고,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준다는 것입니다. 왜죠? 왜 더 많이주고,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떤 보상도 없이 주는것이죠?
그건 내가 그녀에게 '매혹'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주는 것은 내 욕망과 만나는 것입니다. 사랑의 충족을 아는 것입니다. 그 충족의 기쁨은 가득참이 아니라 넘치는 것, 즉 제한성이 없다는 것이죠. 내가 원하는 그 만큼...
나는 그녀를 찬양합니다.
"그녀를 사랑합니다"
"얼마나 사랑하죠?"
"너무너무 사랑합니다!!"
"정말정말 사랑합니다!!"
이 우스꽝스러운 동어반복은, 표현하고도 늘 넘쳐서 모자라는 그 환희, 잉여를 어찌하지 못하는 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르트는 이 '먼 육체'를 '목소리의 육체'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을 잘 대변하는것이 "음악의 감동"입니다. 당신이 음악을 듣고 감동했을때를 떠올려 보면, 아마 잘 알게 될것입니다. 무엇인지 알수는 없지만, 내가 바라고 있었던 어떤것에 꼭맞는것, 소유 할 수 없지만, 그것에 내 모든 감각을 다 주는것, 이것은 사랑의 쾌락상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먼 육체'와의 sex가 가능하게 된다면, 사랑의 고백이 가능해 집니다. 소유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는 이것을 전달할 수 있는건 '말'뿐입니다.
나에 말이 그에게로 가서 그녀를 어루만집니다. 그러나 그 손길은 다시 나에게 와서 내 욕망을 어루만지죠. 이 끝없는 사랑의 중얼거림, 이것을 통해서만 사랑의 욕망이 살아있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정오쯤 회사를 나섰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다, 북촌을 가기로 했죠. 북촌입구에서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 위를 걸었습니다. 태양은 더 뜨겁게 네 육체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삼청공원 올라가는 언덕길을 아메리카노를 홀짝홀짝 마시며,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창덕궁 돌담 어느곳에 몸을 기대어 쉬면서, 이 복잡하고 어려운 "사랑의 단상"을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나에 글들, 이 시니피앙속에 쓰여지지 못하는 시니피에들, 이 시니피앙을 움직이게 만드는 그 무엇, 느껴지는 그 무엇, 고독의 시니피앙, 읽혀지지 못하는 슬픈 시니피에.
그렇다고 이 기표들을 걷어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너무 아파 소리를 지를꺼예요. 마치 피부가 벗겨져 빨간 속살이 들어난 곳에 무언가가 닿은것처럼, '열통'을 느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