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교향곡 2번 을 배경삼아 이 책을 읽었습니다.
19일부터 24일 지금까지 퇴근길을 함께 했죠.
사실 읽고 싶지는 않았지만, 읽어야 했어요. 강의중에 너무나 많이 언급되는 내용이라서, 전반적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강의를 듣기가 어려울 지경이었거든요.
사실 특별한 정서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마지막편지를 쓸때 아주 조금 그리고 짦게 눈물을 흘렸을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시절 유럽 젊은이들을 사로잡았고, 푸른색 바지와 노란셔츠를 입은채 베르테르처럼 자살하는 많은 모방자살을 이끌었던 현재도 "베르테르 효과"라 불리우는 사회현상을 유발했던 이 소설이 오늘 내겐 너무나도 담담하게 읽힐뿐입니다.
Klopstock(클롭슈토크)
이 단어가 책을 읽는 내내 뇌리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무도회에서 갑짜기 쏫아진 폭풍우와 천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로테는 슬픔에 젖어 베르테르의 손을 잡으며 읍조린 말입니다. 그순간 베르테르 역시 클롭시록을 떠올리고 있었죠.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베르테르를 읽으며 전 한 소설을 생각했습니다. 바로 헤르만 헤세의 "봄의 폭풍"입니다. -사랑의 삼중주로 번역된 출판사도 있다. 원제는 게르트루트 이고 '사랑과 죽음과 고독의 서'란 부제가 붙은 소설입니다. 이 소설 역시 끝내 이루지 못한 절망적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독일적 사랑의 주체는 '열정'이고 프랑스적 사랑의 주체는 '질투'라고 바르트는 말합니다. 질투는 소유를 추구한다면 열정은 스스로 소멸하길 바랍니다. 질투에 빠진 사랑은 죽음으로 그 사랑을 가지려 하지만 열정은 끝내 죽지 못하고 심연속으로 소멸해 버리죠.
베르테르는 로테를 소유하려 했던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확실한건 그는 고통을 지우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소멸한 것이란 것입니다.
게르트루트를 사랑한 쿤은 죽음을 결심했지만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실행치 못하며 그녀를 끝까지 지켜보게 됩니다. 쿤의 사랑은 어쩌면 자기애였는지 모릅니다.
완전한 사랑은 모성이라고 바르트는 말합니다. 그후에 사랑은 그것을 향하는 자신의 이미지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융의 아니마/아니무스 이론과 맞다 있습니다. 그사람의 본질을 사랑하는것이 아닌 내 심연속에 아니마/아니무스가 투사된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그를 위해 기쁘게 자신의 생을 버릴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마흔이 넘어 다시 생각한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 그의 곁에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에 그가 존재하는한 사랑을 버릴수 없습니다.
사랑의 근원적 슬픔은 준 만큼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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