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 행위를 조롱하거나 한탄하거나 경멸하기보다는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베네딕트 스피노자,정치논고,1677년
읽기
사랑의 단상,표현,고독 그리고
아펙트2011. 12. 19. 16:39
나는 이제 책상에서 물러나 침대로 들어갑니다. 이 범람하는 감정에 숨이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표현될 수 없는 이 감성, 아무대도 도착할 때가 없는 에너지, 그 어떤 글로도 담을 수 없는 것, 그 모든것을 껴안은체 이렇게 무기력하게 누워 있으려 합니다.
아침이 두렵습니다. 깨어난 아침은 텅빈 세상과 마주하는 듯 합니다. 그 누구도 나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나는 세상속에 홀로 서 있는 버림 받은 고독한 사람입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서 처럼,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에서 처럼, 그러나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 특별한 아침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표현 욕구들이 나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나는 그 안에서 숨이 막혀 죽을것 같습니다. 이 환희속으로의 익사, 고독하면서 동시에 환희의 상태, 표현되어야 하는데, 전달되어야 하는데, 이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이 고통, 아무도 이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마치 독사에게 물린 사람과 같이,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고통을 긍정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저 한 없이 눈물을 흘릴뿐입니다. 슬픔도 원한도 아닌, 그냥 홀로 웁니다. 아니 그냥 눈물이 흐릅니다. 내 모든 에너지가 저절로 넘쳐 흐릅니다. 이 눈물은 내 침대를 적시고, 강물이 되어 흐릅니다. 나는 고독한 땜목이 되어 그 강으로 흘러 갑니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그것은 베르테르가 죽어 묻히려고 했던 곳, 버지니아 울프가 고독을 느꼇던곳, 나의 왕국, 단 하나의 율법과 단하나의 감정과 단 하나의 언어만이 존재하는 곳, 나는 당신을 사랑해!, 이 목소리만 존재하는 곳"
나는 어떤 무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무덤에 귀를 기울이면 거대한 함창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디오니소스적인 사랑을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이데올로기화된 시스템속에서 자발적인 주변인으로 살아가면서 탈 코드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니체에게 노예란 "혀가 잘린 사람"이라고 합니다. 즉 직접 말할 수 없는 존재, 언제나 무언가로 돌려 말하는 것, 그것은 무언가에 노예화 되었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권력에의 의지"를 말합니다.
나는 초자아의 노예입니다. 오늘날을 지배하는 시스템내에 순응하며, 그속에서 안정을 찾으려 하는 어리석은 노예일 뿐입니다.
"베르테르 효과"란 사회현상이 있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의 베르테르처럼, 푸른연미복과 노란조끼를 입고, 권총으로 죽은 베르테르를 따라 같이 자살한 수 많은 젊은이들, 그후 어떤 유명인의 자실이후 발생하는 모방 혹은 동조자살을 사회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지나치게 계몽화된 시스템속에서 억압되고 폄하된 젊음, 그 이름을 되살리려고 했습니다. 이 사랑의 열정이 젊음의 중요한 표현이 되었고, 그 속에서 어떤 탈 코드화를 모색한 것인지 모릅니다. 죽음은 그 누구도 값싸게 생각치 않으니까요.
난 말입니다. 충분히 방황했었다고 자신했었습니다. 젊었던 어느날 무언가 알 수 없는 갑갑함에 사로잡혀 무작정 떠났던 여행길이 있었습니다. 늦은밤 내린 부여에서 금강변을 한참을 걷다가 뭔가 울컥하고 가슴에서 치물어 오르는것이 있었어요. 그 갑갑함의 정체를 알아버린거예요. 속이 시원해야 하쟌아요. 그런데 너무 아팟어요. 너무너무 아파서, 가슴을 부여잡고 길위에 쓰러져 소리없이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내 삶에 최초의 '자각'이었어요. 방황의 고통보다, 자각의 고통이 더 쓰리다는걸 알았던 거예요. 그 순간에 난 방황을 멈춘겁니다. 살고 싶어졌거든요. 시스템과 벌어진 이 간극, 궤도를 이탈한 열차가 다시 철길 위를 달리기 위해선 좀 더 많이 힘들고, 또 뒤쳐지게 되어 있었거든요.
나도 한때, 사랑을 했었어요. 그 어떤 특별한 아침을 알고 있죠. 그 표현되지 않는 고독을 끓어안고 고통스러워 하던 어느날, 라면을 끓려먹다 갑짜기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한번 흘러나온 눈물은 멈추질 않았어요. 그렇게 한참을 울었던, 그 환희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 추억이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에너지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그 기억이 사라져 버린 지금, 앞으로의 삶을 무엇에 기대어 살아야 할지, 두려워 졌습니다. 그래서 요즘 극도의 피로를 느끼고 있습니다. 다시 아픈 사랑을 해야 할까요? 나쁜 사랑을 해야 할까요?
어느 부분이 바르트의 텍스트인지, 또 어느 부분이 김진영교수님의 해석인지, 또 어느 부분이 내 생각인지 사실 잘 구분이 않됩니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을듯 합니다. 바르트는 우리가 모인 강의실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것이고, 난 그 말을 듣고 내 이야기를 했으니까요. 사실 "상상적인 것으로부터의 유형"에 대해서도 정리를 해야 하는데,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그 이야긴 베르테르의 자살에 대한 부분이거든요. 그 시간은 나 스스로도 견디기 힘들것 같네요.
사랑의 단상을 공부하며 내내 이해 되지 않는 부분은 "도착할 수 없는 에너지....."이란 개념이었습니다.
자살 충동을 이야기 하면서, 일반적인 자살충동과 사랑에 빠진자의 자살충동에 대한 부분이나, 고백과 발화 문제라던지, 고독에 대한 문제라든지 이런 문제들에 늘상 나오는 이 개념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었죠. 이젠 이해가 됩니다. 물론 설명할 수는 없죠. 바르트의 텍스트를 공부하면서, 왜 현대 소설이 자서전적인 글쓰기가 됬는지 라든가, 왜 바르트가 이 텍스트를 "소설적인 글쓰기"라 칭했는지, 왜 사랑에 빠진자는 글을 쓸 수 없는지등등을 이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끔 드라이브를 가게 될때면, MP3로 변환한 강의내용을 들으며, 아내와 이런저런 대화를 하곤 합니다. 읽기를 좋아 하는 아내 역시 적지 않은 궁금증을 이 강의를 통해 풀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된다면, 몇일동안 이 내용을 혼자 고독속에서 리뷰하고 싶은 충동이 들곤 합니다. 언젠가 그리 해야 하겠지만, 그 시간이 내게 주어지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때 내가 너무 늙어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후가 아니길 빌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