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 행위를 조롱하거나 한탄하거나 경멸하기보다는 이해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해 왔다

베네딕트 스피노자,정치논고,16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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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서1 -채호기

아펙트 2012. 2. 22. 22:40
 ----비 내리지 않는 습한 거리를 돌아오면서 나는 지쳐서
휘청입니다.
  내 지침을 받아줄 그대, 어디에도 없고, 돌아봐도 없고,
  눈을 감고 느끼려 해도 없고, 없고, 없고,
  이렇게 많은 생각과 이렇게 넘치는 마음뿐인 내 사랑.
  "넌 잘 갔느냐고 전화도 한번 못 하니?"
  (떠오르네 네 모습. 떠오르네, 떠오르네 습한 거리를 벗어
나 따뜻함이 있는 실내에서, 음악이 흐를지도 모르지...... 만
년필을 잡고 있는 네 흰 손. 네가 편지 쓸 때의 마음의 공간
속으로, 네가 쓴 글자들을 따라 들어가네. 그 공간은 시간이
없네. 널 찾는다. 넌 없어. 보이는 듯하다. 만져질 듯하다. 그
러나 긴 한숨의 몸. 비대한 한숨이 주윌 두리번거리네.
  떠오르네 네 모습. 떠오르네, 떠오르네 편질 쓰다가 힐끔
전화기를 건너다보는 네 얼굴. 그때가 언제였나...... 편지 끝
에 날짜가 없다. 우표 위에 찍힌 스탬프 도장을 지나간다.)

 ---- 무서운 것은 사랑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는 데 있지
않고 애초에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 네가 내 손을 잡아
줄 수 없듯이, 내가 네 손을 잡아줄 수 없음.[각주:1] 
  (방문이 열렸던가...... 어느새 책상 위에 어두운 그림자.
귓속으로 고압선 전류가 빠르게 달려가고, 순간, 얼굴이 숯불
처럼 달아오르지만, 태연하게 그림자의 주인을 올려다보네.
눈은 계속 그 사람을 묶어두면서 옆에 있는 책을 들어, 엉거
주춤, 읽던 엽서를 덮네.)

 ----사랑하는 것이 죄로 둔갑한다면
  그때 우리는 무엇을 사랑할 것인가[각주:2] 
  (불륜이라는 글자가 난데없이 머리에서 뛰쳐나와 땀방울
처럼 뚝뚝 떨어지네. 잉크가 번지고 엽서가 온통 더럽혀지
네. 에잇! 끝끈이같이 눌어붙은 이 더러운 목숨아!)

  ----나를 사랑합니까?
  아니오. 아니오. 아니오.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아파서 싫어요.
  (떠오르네 울음을 참는 입술 깨문 이빨, 그 모습이 아아,
아프네 살갗을 쥐어뜯는 무딘 면도날처럼...... 재빠르게 써
내려가는 너의 손과 얼굴은 그 당시 평온하고, 내 마음 쏟아
지도록 출렁거리는 글자들이 아그작아그작 시간을 잡아먹고
는 유령처럼 시침 뚝 떼누나.)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
  부질없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 어리석음.
  (초조하다. 네가 사라질 것 같아. 이 엽서마저. 엽서는 끝
나고 더듬거리며 뒤집어 인쇄된 그림 샤갈의  『새와 꽃다발』
의 붉은 주조색 속에서 찾는다, 암호를. 그림의 공간에 공간
이 겹쳐진 공간으로 들어가 단정한, 겹겹의 옷을 껴입은 너
의 옷을 벗긴다. 이런! 단추가 모두 칼날이야! 베어 쓰라린
상처에서 피가 돋는다. 이건! 옷이 아니라 가시덤불이야!) 

채호기 시인의 시집 <지독한 사랑> 중에서 

1994.4.22
라고 시집 맨앞에 적혀 있다.
그때 나는 남대문에 있는 회사에 다니면서, 퇴근 후 을지로에 있는 친구 회사에 놀가서 종로통에서 자주 술을 마셨다. 그러니 아마도 종로서적이나 교보에서 구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당시 나는 문지사의 시인선을 1권부터 정주행하여 따라잡겠다고  호기를 부리던 시절이었다. 물론 그렇게 하지 못했지만 그 호기의 흔적은 지금 내 책장에 마흔여권의 시집으로 바래져서 남아 있다. 그때의 나는 실연의 고통에 어쩔줄 몰라했고, 또 불투명한 미래와 실망스럽기만 한 현실에 그저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고통을 달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건, 나를 빨리 고통의 저 밑바닥까지 끓어 내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매일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해 '시'를 읽었다. 더 슬프고 더 절망스러운 '시'를 찾다가 읽게된 시집이 이 채호기의 <지독한 사랑>이다.
그냥 좋았다. 어떤 감동, 그런것이 아닌, '몸', 찢기고, 피 흘리는 몸, 그대 속에 들어간 내 몸, 몸, 몸 

약속했던 마흔이 훌쩍 넘었다.
아직도 어떻게 '시'를 읽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읽고, 읽고, 읽고 또 읽어 보려 한다.

무엇이 그때와 같으며, 무엇이 그때와 다른지.
(아무것도 다르지 않겠지만)


 
  1. * 이성복 『그대에게 가는 먼 길』, 639번 [본문으로]
  2. ** 같은 책, 461번.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