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메마른 날씨는 참을만 합니다. 땀이 나지만 않는다면 뜨거움쯤은 견딜만 해요. 예전엔 이런 날씨에 긴팔 긴바지 작업복을 입고, 작업화가 녹을정도로 뜨거워진 공장 옥상에서 용접을 하기도했죠. 아마 샤워시설만 있었다면 견딜수 있었을꺼예요. 가끔 그시절이 그립기는 합니다만 그때도 난 주변인 이었죠.
지금 내게 필요한건, 희망, 사랑, 극복 이런게 아닐껍니다. 그러니 위로는 하지 마세요. 난 좀더 깊게 치열하게 절망에 빠져야 해요. 나자신을 안다는건 아마도 죽음의 강을 건너는 순간일듯 합니다. 그래서 그냥 철저히 절망에 빠지려 합니다. 그래서 더이상 절망할수 없을때 그때가 되면 저절로 이 덧없는 삶을 인정하게 되겠죠. 난 신앙에 기대거나 체념하는 비겁자가 아니예요.
니체의 말대로 절망하는 사람은 인류의 정제된 사람인듯 합니다. 파스칼은 아주 예리한 인식의 도움을 받으면 누구라도 절망에 빠지지 않을것이다란 걸로 실험을 했는데, 실폐했답니다. 그리고 파스칼은 제2의 절망에 빠졌답니다.(서광,64)
아무래도, 지금은 들뢰즈를 읽을때가 아닌듯 합니다. 데리다에서 바르트로 , 들뢰즈에서 니체로 내려와야 할것 같습니다. 어제만 해도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필연이 드디어 생겼다고 기뻐했는데, 아직 이것도 아닌듯 합니다. 쇼펜하우어부터 시작을 할지 아니면 더 내려가야 할지 좀 고민이 필요합니다.
학습은 사랑의 정념에 빠져있을때가 가장 효과가 좋다고 누가 그러네요. 동의합니다. 민감해서 그럴지 모르죠. 또 각성상태구요.
무슨 게임하듯 절망하고 슬퍼하고 그러는거 같습니다. 실은 많이 아파요. 좀 익숙해 진것도 있고, 또 나이가 있쟌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의 아픔에 비한다면 이정도 쯤은 그냥 몸살이죠. 저녀석은 지독한 폐렴이예요. 죽음에 이르는 무서운, 그렇게 사랑하다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말' 해봅니다.